[스크랩] ...왜냐하면 나는 아주 비싼 몸이니까.
벼랑 끝에 서서 까마득한 아래를 내려다보니 다리가 후들거린다.
나는 일단 뒤로 물러섰다. 솔밭 아무데나 주저앉아 소주병을 땄다.
“아빠는 직장도 변변치 않은 사람에게 딸을 줄 순 없다면서 펄펄 뛰셔. 이젠 나도 어쩔 수가 없어….”
내 합격 소식만을 애타게 기다리던 수정이는 울음을 터뜨렸고 더 이상 나를 만나지 않겠다고 통고해 왔다. 수정이가 이럴 줄은 몰랐다. 거듭되는 내 불운을 안타까워하면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지난 4년 동안 한결같은 마음으로 내 곁에 있어주었던 그녀였는데….
그래, 이쯤에서 끝내자. 되는 일이라곤 하나도 없는 인생, 나도 지쳤다. 눈 꾹 감고 몸 한번 날리면 그걸로 끝이다. 나는 소주를 들어 병나발을 불었다. 빈속을 훑으며 내려간 술은 금세 얼굴을 달궜다.
“맨정신으론 안 되겠나 보지?”
느닷없이 들려온 남자 목소리에 얼마나 놀랐던지 나는 그만 소주병을 발 아래로 떨어뜨렸다. 60대로 보이는 남자였다. 그는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쓰러진 술병을 세워놓고 내 옆에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최후의 술은 포도주로 하지 그랬어? 멋있어 보이잖아?”
나는 그의 손에서 소주병을 낚아채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전 지금 말할 기분 아니니까 저리 가세요.”
남자는 불퉁스럽게 대꾸하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붉고 동그스름한 얼굴에 약간 벗겨진 머리, 동네 이발소나 목욕탕에서 마주칠 법한 평범한 인상이었으나 가느스름한 눈매는 어쩐지 내 속을 통째로 꿰뚫어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자네가 이 산을 통째로 샀나? 나도 여기 앉겠네.”
못마땅했지만 달리 할 말이 없었다.
남자는 배낭에서 음식 꾸러미를 꺼내 풀어헤쳤다.
“이봐, 이거 마누라가 싸준 건데 먹어볼텨? 큰애가 고3일 때 마누라가 대장암으로 죽었어….”
그는 혼잣말하듯 이야기를 시작했다.
“엎친 데 덮친다고 부도까지 맞고 나니 정말 세상이 캄캄하더군….”
그가 잠시 침묵하자 불현듯 평일 오후 산속의 적막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허전함이 밀려와 슬그머니 개떡 하나를 집어들어 입에 쑤셔넣었다.
“죽을 데를 찾아다녔지. 저기 저 벼랑 끝. 딱 좋지 않은가. 아래 내려다봤어? 온통 바위들뿐이지 않은가. 맨정신으론 안 되겠기에 깡소주를 들이켰지. 자네처럼 말이야.”
쳇, 비웃는 거야 뭐야. 나는 입을 비죽거리며 말했다.
“그날 나는 그냥 산을 내려왔네. 마누라가 죽는 순간까지 마음에 걸려하던 막내딸이 눈에 밟혀서 도저히 뛰어내리지 못하겠더군. 그때 저 벼랑 끝에서 난 딱 일년만 더 살기로 나 자신과 약속을 했다네. 그리고 오늘이 일년 뒤의 바로 그날일세.”
"뭐라구요? 그럼 아저씨도 죽으려고 여길 올라왔단 말예요?”
그는 나를 돌아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나직한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얘기를 끝까지 들어야지. 그로부터 일년 뒤, 난 약속대로 이곳에 왔지만 또다시 그냥 내려갔다네. 일년 동안 주방 보조 일을 하면서 조리사 자격시험을 준비했는데 마침 합격을 해서 기분이 상당히 업되어 있었거든. 돌아보니, 썩 좋아진 건 없지만 그래도 일년 전보다 더 나빠진 것 같진 않았어. 딱 일년만 더, 열심히! 살아보기로 했다네. 그리고나서 결정해도 늦지 않겠다 싶었지. 다음 해에도, 또 그 다음 해에도 나는 이곳을 찾았고…… 오늘로 십오 년째야.”
농락당한 기분이었다. 남은 소주를 들이켰고 후끈 달아오른 얼굴로 마구 쏘아붙였다.
“아하, 사장님, 그래서? 지금은 돈도 모았고 새 장가도 가셨고요? 죽을 이유가 없겠네요? 그러니까 지금 저한테 잘난 척 하시는 거군요, 안 그래요?”
내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난 돈도 많이 벌었고 재혼도 했어. 얼마 전엔 손주도 보았지. 십오 년 전엔 상상도 못했던 행복이야. 일년 뒤로 미룬 그때의 내 결정은 정말 현명했던 거지. 이제 나에게 이곳은 더 이상 죽기 위한 장소가 아니야. 더 열심히 살기 위해서, 나자신을 자극하기 위해서 1년에 한번씩 찾아오는 성소인 셈이지. 자네라면 어떻게 할 텐가? 자네 생각은 어때?”
“일년 뒤라…. 네, 그래요, 죽을힘을 다해 살아보는 거, 나쁘지 않게 들리네요. 그치만 할 줄 아는 거라곤 공부밖에 없었는데 그마저 신통찮은 데다 문제는 제가 빈털터리라는 거죠.”
그는 내가 주절주절 떠드는 것을 듣고 난 뒤 진지한 어조로 물었다.
“만약 누군가가 백억을 줄 테니 두 다리를 팔라고 하면, 자넨 그렇게 하겠나?”
나는 생각했고 고개를 저었다.
“만약 누군가가 백억을 줄 테니 두 팔을 팔라고 하면, 자넨 그렇게 하겠나?”
나는 생각했고 또다시 고개를 저었다.
“만약 누군가가 백억을 줄 테니 두 눈을 팔라고 하면, 자넨 그렇게 하겠나?”
나는 생각했고 고개를 마구 내저었다.
“그렇다면 자넨 지금 최소한 3백억 이상을 갖고 있는 셈 아닌가?
대한민국에 등록된 장애인만 200만명이 넘는다네.
세계적으로 굶어서 죽는 사람이 1년에 3500만 명이 넘지.
지금 이 시간에도 하루에 10만명 이상이 굶어 죽는다네. 굶어 죽기 전까지 살기 위해서 뭔들 안 먹었겠나?
그런 장애인, 굶주린 사람, 죽음을 맞이하는 환자, 전쟁이나 군사독재정권, 노예신분, 기타 인권유린 속에 있는 사람들은 자네 같은 상항을 시련도 아니라고 생각할 걸세.
그 말을 끝으로 그는 손가락을 입술에 붙이며 속삭이듯이 말했다. 쉬잇, 들어봐 저 소리…. 귀를 기울였다. 구룩구룩 산비둘기 우는 소리, 이름을 알 수 없는 산새들의 지저귐, 솨아 바람에 쓸리는 나뭇잎 소리…. 눈이 절로 감겼다.
“죽을힘을 다해 살아봐. 그리고 일년 뒤 오늘 이 자리에서 만나세. 일년 뒤….”
그의 마지막 음성은 최면을 불러오는 레드썬이었는지도 몰랐다. 눈을 떴을 때 산속은 이미 저물녘이었다. 마치 깊은 잠에서 깬 사람처럼 나는 불현듯 하산을 서둘렀다. 발을 헛딛지 않도록 조심했다. 왜냐하면 나는 아주 비싼 몸이니까.